6.근거가 허용하는 만큼만 판단한다
정확한 판단은 근거가 실제로 보여 주는 범위를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자료에서 확인된 내용과 아직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내용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일부 대상에게서 얻은 결과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특정한 시기와 장소, 조건에서 나타난 결과라면 결론에도 그 범위를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 근거가 제한되어 있다면 판단의 강도 역시 그에 맞게 조절해야 한다. 반대로 충분히 확인된 내용까지 필요 이상으로 약하게 표현할 이유도 없다. 좋은 판단은 언제나 약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의 범위와 결론의 크기를 정확하게 맞추는 데 있다.
1)확인된 내용과 확인되지 않은 내용
자료를 읽을 때에는 무엇이 실제로 확인된 내용인지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다음 자료에서 직접 확인된 사실과 그 사실을 바탕으로 추가로 해석하거나 추론한 내용을 구별해야 한다. 조사에서 두 현상이 함께 나타났다는 사실과 하나의 현상이 다른 현상의 원인이라는 판단은 같은 것이 아니다. ‘관련성이 나타났다’, ‘가능성이 있다’, ‘영향을 줄 수 있다’와 같은 표현도 서로 다른 정도의 판단을 나타낸다. 이러한 내용을 ‘입증되었다’거나 ‘확실한 원인이다’로 바꾸면 자료가 보여 주는 것보다 더 강한 결론이 된다. 자료가 어디까지 확인했는지를 먼저 구별해야 판단의 범위와 강도를 정확하게 조절할 수 있다.
“한 연구팀은 중학생 500명을 대상으로 일주일 동안의 운동 시간과 수업 중 집중 상태를 조사했다. 학생들은 하루에 운동한 시간을 기록했고 수업 중 집중의 어려움을 묻는 설문에도 응답했다. 조사 결과, 운동 시간이 긴 학생 집단은 운동 시간이 짧은 집단보다 평균 집중도 점수가 높게 나타났다. 이 조사에서는 운동 시간과 집중도 점수 사이에 일정한 관련성이 관찰되었다. 그러나 연구팀은 운동이 집중도를 직접 높였다고 결론 내리지는 않았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학생이 운동과 학습을 모두 꾸준히 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면 시간과 건강 상태, 학습 환경이 두 현상에 함께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을 확인하려면 이러한 조건을 고려한 추가 연구가 필요했다.”
이 자료에서 직접 확인된 내용은 조사에 참여한 학생 가운데 운동 시간이 긴 집단의 평균 집중도 점수가 더 높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해당 조사 집단에서 운동 시간과 집중도 점수 사이에 관련성이 나타났다. 그러나 운동이 집중도를 높인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점까지 확인된 것은 아니다. 운동을 많이 하는 학생이 충분히 자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다른 조건이 집중도에 영향을 주었다면 운동만의 효과를 구별하기 어렵다. 따라서 ‘운동 시간이 긴 학생의 집중도 점수가 높게 나타났다’는 확인된 결과와 ‘운동이 집중도를 높였다’는 인과적 해석을 같은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확인된 내용과 아직 검토가 필요한 해석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운동이 집중도에 영향을 줄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관찰된 관련성은 운동의 효과를 더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새로운 질문을 만들 수 있다. 다만 현재 단계에서는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거나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는 수준으로 표현해야 한다. 다른 조건을 통제한 연구에서 비슷한 결과가 반복된다면 인과관계에 관한 판단은 더 강해질 수 있다. 자료를 해석할 때에는 먼저 확실하게 확인된 내용을 말하고 그다음 가능한 설명을 구분하여 제시하는 것이 좋다. 가능성을 사실처럼 단정해서도 안 되지만 확인된 결과를 단순한 추측처럼 흐려서도 안 된다. 무엇이 확인되었고 무엇이 아직 남은 질문인지를 나누어 말하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다.
2)판단의 범위를 조절하는 방법
판단의 범위는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와 어느 기간, 장소에 관한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판단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나타내는 표현도 중요하다. 한 학교에서 얻은 결과를 전국의 모든 학생에게 그대로 적용하거나 올해 나타난 변화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단정하면 근거의 범위를 넘어설 수 있다. 근거가 제한적이라면 ‘이 조사에서는’, ‘일부’, ‘가능성이 있다’, ‘도움이 될 수 있다’와 같은 표현으로 범위를 나타내야 한다. 반대로 충분히 확인된 사실을 계속 가능성으로만 표현하면 자료의 의미를 필요 이상으로 약하게 전달할 수 있다. 결론의 대상과 기간, 장소, 확실성을 근거가 보여 주는 수준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한 중학교의 두 학급은 한 학기 동안 새로운 어휘 학습 방법을 사용했다. 학생들은 매주 배운 낱말을 예문 속에서 사용하고 친구에게 그 뜻을 설명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학기 말 평가에서 두 학급 학생들의 평균 어휘 점수는 학기 초보다 높아졌다. 기존 방법을 사용한 다른 학급과의 비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담당 교사는 이번 활동이 학생의 어휘 학습에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두 학급의 학생은 모두 같은 학교의 같은 학년이었고 참여 기간도 한 학기에 한정되었다. 다른 연령과 학교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성적 향상이 새로운 방법 때문인지 한 학기 동안의 반복 학습 때문인지도 추가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 자료에서 직접 확인된 범위는 한 중학교의 두 학급과 한 학기라는 기간이다. 따라서 ‘이 학습 방법은 모든 학생의 어휘력을 높인다’라고 결론 내리면 대상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진다. 기존 방법을 사용한 비교 학급이 없었으므로 성적 향상이 새로운 활동만의 효과라고 확정하기도 어렵다. ‘이번 활동에 참여한 두 학급에서는 한 학기 뒤 평균 어휘 점수가 높아졌다’라고 표현하면 자료가 확인한 범위를 유지할 수 있다. ‘이 학습 방법이 어휘 학습에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도 현재 근거의 수준과 비교적 잘 맞는다. 학교와 학년, 참여 기간을 결론에 함께 남기면 자료가 어디에서 얻어졌는지 분명해진다. 판단의 범위를 조절한다는 것은 근거가 다루지 않은 대상까지 함부로 포함하지 않는 일이다.
항상 가장 조심스럽고 약한 표현만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사에 참여한 두 학급의 평균 점수가 실제로 높아졌다면 ‘점수가 높아졌을 수도 있다’라고 표현할 필요는 없다. 해당 학생들의 점수 상승은 자료에서 확인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변화의 원인과 다른 학생에게도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지는 가능성의 수준으로 남겨야 한다. 이후 여러 학교와 연령의 학생을 대상으로 비슷한 결과가 반복되고 비교 집단에서도 차이가 확인된다면 판단의 범위를 넓힐 근거가 생긴다. 근거가 넓어질수록 결론도 그 수준에 맞게 넓힐 수 있다. 정확한 표현은 언제나 약한 표현이 아니라 근거와 같은 크기의 표현이다.
3)조건을 포함한 결론
어떤 결과나 판단은 특정한 조건에서만 성립한다. 이때 조건을 빼고 결과만 남기면 원래 자료가 말하는 범위와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대상과 환경, 시간 같은 조건이 결과가 나타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러 조건이 함께 제시된 경우에는 어떤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처럼 여러 조건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표현과 ‘또는’처럼 조건 가운데 하나만 충족해도 된다는 표현은 적용 범위를 다르게 만든다. 내용을 정리할 때에는 결과뿐 아니라 그 결과가 나타난 조건까지 함께 남겨야 한다.
“한 학습 프로그램은 일정한 생활 습관과 공부 시간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학생 120명을 조사했다. 학생들은 한 달 동안 매일 비슷한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최소 7시간 이상 수면을 취했다. 또한 학교 수업이 끝난 뒤 매일 같은 시간에 40분씩 복습했다. 한 달 뒤 참가 학생의 평균 기억 검사 점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보다 높아졌다. 연구진은 충분한 수면을 유지하면서 일정한 시간에 복습한 학생에게서 기억 검사 점수가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충분히 자지 않으면서 같은 시간에만 공부한 학생은 따로 조사하지 않았다. 복습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충분히 잔 학생과도 비교하지 않았다. 따라서 두 조건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제시문에서 학생들은 최소 7시간의 수면과 매일 같은 시간의 복습이라는 두 조건을 함께 유지했다. 그 결과 참가 학생들의 평균 기억 검사 점수가 이전보다 높아졌다. 이를 ‘일정한 시간에 공부하면 기억력이 높아진다’라고만 정리하면 충분한 수면이라는 조건이 빠진다. 반대로 ‘충분히 자면 기억력이 높아진다’라고 정리하면 일정한 복습이라는 조건이 사라진다. 조사에서는 두 조건이 함께 적용되었으므로 어느 하나의 조건만으로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충분한 수면을 유지하면서 일정한 시간에 복습한 참가 학생에게서 기억 검사 점수가 높아졌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조건을 함께 남겨야 자료가 직접 확인한 결과의 범위를 유지할 수 있다.
정책이나 제도에 관한 판단에서도 조건은 중요하다. ‘대중교통이 충분한 지역에서는 자동차 이용 제한이 교통량 감소에 도움이 될 수 있다’에서 대중교통의 이용 가능성은 핵심 조건이다. 이 조건을 빼고 ‘자동차 이용을 제한하면 교통량이 감소한다’고 표현하면 대중교통이 부족한 지역까지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조건이 ‘그리고’로 연결되면 모든 조건이 필요한지 확인해야 한다. ‘또는’으로 연결되었다면 그중 하나만 충족해도 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짧게 요약한다는 이유로 조건을 없애면 결론의 적용 범위가 원문보다 넓어진다. 결과가 성립하는 조건은 주변 정보가 아니라 결론의 의미를 결정하는 핵심 내용일 수 있다.
4)단정하지 않아야 할 때
근거가 부족하거나 여러 설명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단정적인 표현을 조심해야 한다. ‘분명히’, ‘반드시’, ‘틀림없이’와 같은 말은 높은 수준의 확실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려면 다른 설명을 충분히 검토하고도 유지되는 강한 근거가 필요하다. 자료가 가능성만 보여 준다면 결론도 가능성의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 특히 복잡한 사회 현상과 미래의 변화에는 여러 요인이 영향을 줄 수 있다. 현재 자료로 확인할 수 없는 부분까지 확정하여 말해서는 안 된다.
“해오름동의 카페 이용자는 최근 석 달 동안 매달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이 지역에서는 재택근무를 시행하는 회사가 늘었다. 한 지역 신문은 재택근무 증가로 직장인들이 집 근처 카페를 업무 공간으로 이용하면서 카페 방문이 늘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일부 카페 주인은 평일 낮에 노트북을 사용하는 손님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대형 카페 두 곳이 새로 문을 열었고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외출하는 사람도 늘었다. 지역에서는 매주 주말 시장과 문화 행사도 열렸다. 카페 이용자 증가가 재택근무 때문인지 새로운 매장과 행사, 계절 변화 때문인지는 구별되지 않았다. 최근 석 달의 증가가 다음 해에도 계속 이어질 것인지도 현재 자료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재택근무 증가가 카페 이용자 증가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있다. 평일 낮에 노트북을 사용하는 손님이 많아졌다는 관찰은 이러한 설명과 관련된다. 그러나 새로운 카페의 개점과 지역 행사, 계절 변화도 방문객 증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각 요인의 영향을 구별한 자료가 없으므로 재택근무를 유일한 원인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재택근무가 증가했기 때문에 카페 이용자가 늘었다’보다 ‘재택근무 증가가 카페 이용 증가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가 현재 근거에 맞는 표현이다. 또한 석 달 동안 나타난 증가만으로 다음 해에도 방문객이 반드시 계속 늘 것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 원인과 미래를 판단할 때에는 현재 자료가 실제로 확인한 기간과 조건을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단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거나 책임을 피하는 일이 아니다. 확인된 사실은 분명하게 말하고 확인되지 않은 부분은 가능성과 한계가 드러나도록 표현하는 것이다. ‘카페 이용자가 최근 석 달 동안 증가했다’는 확인된 자료라면 그대로 말할 수 있다. 반면 증가의 원인과 앞으로의 추세는 추가 자료가 필요한 내용이다. 여러 설명이 가능할 때에는 각각의 가능성을 구별하고 무엇을 더 확인해야 하는지 제시할 수 있다. 근거의 수준에 맞는 표현을 사용하면 결론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좋은 판단은 자신 있게 단정하는 데서가 아니라 어디까지 확인되었는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데서 나온다.
주장을 제대로 판단하려면 먼저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이유와 근거를 확인해야 한다. 근거가 주장과 직접 연결되는지 살펴보고 그 자료만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한지도 따져 봐야 한다. 사례 하나나 제한된 자료를 지나치게 넓은 집단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원인을 판단할 때에는 시간 순서와 단순한 관련성만으로 결론을 확정하지 않아야 한다. 반론과 반례를 함께 읽으면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 조건과 보완해야 할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결론의 대상과 기간, 조건, 확실성의 정도를 근거가 보여 주는 범위와 맞추어야 한다. 근거가 허용하는 만큼만 판단하는 습관이 신뢰할 수 있는 읽기와 논리적인 표현의 바탕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