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돌봄의 개념과 사회복지적 의미
3. 돌봄윤리와 돌봄 관계
돌봄 윤리는 정해진 원칙만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기는 필요와 책임을 중요하게 보는 윤리적 관점이다. 이는 인간을 항상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존재로 보는 기존 관점이 인간의 의존성과 돌봄 경험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에서 발전했으며, 감정과 관계, 상황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보편적인 권리와 정의의 원칙을 함께 고려한다(Held, 2006). 돌봄 서비스에서는 제공자와 이용자 사이에 정보와 자원, 결정 권한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신뢰와 공감뿐 아니라 권한과 책임의 문제도 중요하게 살펴야 한다. 따라서 돌봄 윤리는 이용자의존엄성과 참여를 보장하고 돌봄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줄이는 실천 기준을 제시한다.
1) 돌봄윤리의 등장 배경
돌봄 윤리는 권리, 규칙, 공정성을 중심으로 한 도덕 발달 이론이 관계의 유지와 구체적인 타인에 대한 책임을 중시하는 도덕적 관점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 제기에서 발전하였다(Gilligan, 1982). 도덕적 판단에는 보편적인 규칙을 적용하는 능력뿐 아니라 누가 어떤 상황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관계의 단절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피는 능력도 포함된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사이의 만남과 반응을 윤리의 출발점으로 보는 관점은 돌봄을 추상적인 덕목이 아니라 실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으로 발전시켰다(Noddings, 1984). 이후 돌봄 윤리는 가족 안의 친밀한 관계를 넘어 노동시장, 사회정책, 민주주의에서 돌봄의 책임과 자원이 어떻게 배분되는지를 분석하는 정치적 이론으로 확장되었다(Tronto, 1993). 이러한 변화는 돌봄을 여성의 사적인 역할로 여기던 관행을 비판하고 돌봄의 사회적 조건을 공적 논의의 대상으로 전환하였다. 돌봄 윤리의 등장은 가족 안에서 무급으로 수행되거나 낮은 임금의 서비스 노동으로 제공되던 돌봄이 도덕 이론과 사회정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현실과 관련된다. 돌봄을 여성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향으로 설명하면 성별 분업을 당연하게 여기고 돌봄 노동의 책임을 다시 여성에게 집중시킬 위험이 있으므로, 현대의 돌봄 윤리는 돌봄을 특정 성별의 본성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경험하고 사회 전체가 분담해야 하는 보편적 실천으로 이해한다. 정의가 권리와 자원의 공정한 배분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면, 돌봄은 구체적인 필요가 실제로 발견되고 충족되는 관계의 과정을 보여 주므로 두 관점은 서로 보완할 수 있다(Engster, 2007). 사회복지 실천에서 돌봄 윤리는 규정의 형식적인 적용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개별 상황을 세심하게 살피면서도 권리와 공정성을 지키는 판단의 틀을 제공한다.
2) 관계성과 책임의 의미
관계성은 개인의 정체성, 능력, 선택이 타인과제도, 사회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자율성도 관계를 끊고 혼자 결정하는 능력이라기보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필요한 지원을 활용하며 부당한 영향에 맞설 수 있게 하는 관계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다(Nedelsky, 2011). 돌봄에서 책임은 타인의 필요를 알아차린 사람이 이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이 대응할 수 있는 범위와 방법을 판단하는 도덕적·실천적 의무이다. 그러나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에게 무제한의 책임을 부과하면 가족 돌봄자의 권리와 삶이 침해되고 사회적 책임이 개인에게 떠넘겨질 수 있다. 관계성과 책임의 원리는 개인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돌봄의 의무를 가족, 전문가, 기관, 지역사회, 국가 사이에 공정하게 배분하도록 요구한다. 전문적 돌봄 관계에서 책임은 이용자의 모든 문제를 제공자가 대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합의된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적절한 전문가나 기관에 연결한 뒤 지원이 실제로 이어졌는지 확인하는 것을 뜻한다. 제공기관은 개별 종사자의 헌신에만 의존하지 않고 충분한 인력, 적정한 업무량, 교육, 지도, 위험 관리 체계를 마련할 조직적 책임을 진다. 이용자와 가족도 돌봄 계획에 참여할 수 있지만, 서비스 부족이나 재정 제약에서 비롯된 문제까지 개인의 선택과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관계적 책임은 각 주체의 역할과 한계를 명확히 하면서 지원의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의 책임과 공적 책임을 연결하는 원리이다.
3) 신뢰·공감·존중에 기반한 돌봄
신뢰는 돌봄 제공자가 약속한 시간과 절차를 지키고 개인정보를 보호하며, 이용자의 취약한 상황을 부당하게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에서 형성된다. 돌봄을 받는 사람은 신체 접촉, 가정생활, 사적인 정보를 제공자에게 공개해야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신뢰가 깨지면 서비스 이용을 중단하거나 도움 요청을 꺼릴 수 있다. 공감은 이용자의 감정과 관점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제공자가 이용자와 같은 경험을 했다고 가정하는 태도와는 다르다. 존중은 모든 사람의 동등한 존엄성을 인정하면서 선호, 문화, 생활 방식, 의사 표현 방법, 거부 의사를 실제 서비스 결정에 반영하는 원칙이다. 신뢰와 공감, 존중이 결합될 때 돌봄 관계는 일방적인 도움이 아니라 이용자의 경험과 반응에 따라 조정되는 상호적인 실천이 된다(Noddings, 1984). 신뢰를 형성하려면 서비스의 목적과 범위, 비용, 예상되는 위험, 정보 이용 방식, 변경 가능성을 이용자가 이해하기 쉬운 말로 설명해야 한다. 공감적 의사소통은 이용자의 말을 잘 듣는 데서 시작하며, 드러나지 않은 감정을 임의로 판단하기보다 질문과 확인을 통해 정확히 이해하는 과정이다. 존중은 이용자가 전문가의 권고와 다른 선택을 하거나 서비스를 거부할 때에도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가능한 대안을 함께 검토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약속 위반이나 정보 유출처럼 신뢰를 해치는 일이 발생하면 사실을 숨기지 않고 알리고 피해 회복과 재발 방지 조치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안정적인 담당 체계, 충분한 방문 시간, 교육과 지도, 고충 처리 제도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4) 돌봄 관계의 권력과 의존 문제
돌봄 관계에서는 제공자가 서비스 정보, 전문지식, 기록 권한, 시간 배분, 기관 자원에 더 쉽게 접근하기 때문에 구조적인 권력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이용자가 신체 활동이나 의사소통, 일상생활에서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할수록 부당한 대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관계를 끝내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제공자가 일정, 식사, 외출, 신체 접촉 방식을 일방적으로 정하면 사소해 보이는 일상적 결정도 이용자의 자유를 제한하는 통제 수단이 된다. 선의를 앞세운 보호도 당사자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으면 위험을 이유로 선택권을 빼앗는 지나친 간섭으로 변할 수 있다. 돌봄 윤리는 권력이 강제적인 방식뿐 아니라 누가 필요를 정하고 누구의 판단을 우선하는지를 통해서도 행사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Sevenhuijsen, 1998). 권력의 남용을 예방하려면 이용자가 서비스 내용과제공자를 선택하고 변경하며, 불만과 피해를 안전하게 제기할 수 있는 절차를 보장해야 한다. 의사결정에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도 가능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하도록 지원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편의를 위해 이용자의 결정을 대신하는 관행은 최소화해야 한다(UN, 2006). 돌봄 종사자도 이용자나 가족의 폭력, 성희롱, 과도한 요구, 기관의 부당한 업무 지시를 경험할 수 있으므로 돌봄 관계의 권력 문제를 이용자와 종사자 사이의 단순한 대립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기관은 권리 교육, 기록과 점검, 독립적인 고충 처리, 학대 신고, 종사자 보호, 외부 감독을 통해 관계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관리해야 하며, 필요한 도움을 안정적으로 제공하면서 권력 행사의 이유를 설명하고 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